[창업이야기] 8. 일상, 리더, 회의
일상
디자인과 기획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개발에 착수하게 됐다. 나와 션은 매일 9시까지 렌스의 집으로 출근해 6시까지 일했고, 데이브는 프리랜서 일을 병행했기 때문에 회사에 출근해서 일하는 날은 일주일에 1-2번 정도 됐다. 데이브가 프리랜서 일을 병행해야 했던 이유는 금전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창업이라는 것이 뭔가 그럴 듯해 보이고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연히 감수해야 되는 현실이 있었다. 나와 션은 모두 한국인이고 그때만 해도 서로 부모님 집에 얹혀살았기 때문에 약간의 돈만 있어도 생활유지가 가능했지만 데이브는 달랐다. 데이브는 매달 집세에 생활비 그리고 여러 가지로 필요한 돈이 많은 것 같았다. 나와 션은 각각 한 달에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았다. 다르게 표현하면 버텼다. 데이브의 경우에는 일하는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적은 돈을 가져갔다. 이 돈은 렌스가 회사를 위해 투자하는 돈이었다. 그 당시 나와 션은 모두 교제 중인 여자친구가 있었고 결혼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적은 금액의 돈으로 인해 결혼 준비 자금을 모을 수 없다는 심리적인 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잘 될 것 같다는 믿음과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의 지지가 있어서 부담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상은 보통 출근해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특별히 IT업계에 이슈가 되고 있는 뉴스나 앱, 서비스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각자 일을 했다. Chavatar프로젝트 때는 나 혼자 iOS 개발을 했지만, 션도 금방 배워서 Blogsy프로젝트는 함께 개발을 하게 되었다. 점심 식사 시간이 되면 나는 션과 함께 각자 싸온 도시락을 꺼내놓고 아이패드로 버라이어티 쇼 같은 것을 보면서 밥을 먹었다. 오후에도 오전과 비슷하게 집중해서 주어진 일을 하고, 중간에 밖에 나가 간식을 사서 먹고 퇴근시간까지 일하는 것이 보통의 일상이었다. 일하는 중간중간 렌스가 사무실로 들어와 새로운 프로젝트가 될만한 아이디어를 내서 그때마다 그것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기도 했다. 데이브가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이면 그 날은 보통의 날보다 더 활기차고 기운이 넘쳤다.
리더
함께 일을 시작한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Blogsy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리더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직함이야 렌스가 CEO였고, 렌스가 회사에 투자도 하고 사무실도 제공하는 등 많은 희생을 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렌스가 리더라는 느낌보다도 공동창업자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컸다. 나는 리더라고 하면 다른 동료들보다는 뭔가 위치가 다른 것 같아서 그런 것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리더가 필요했다. “나는 윗사람 너는 아랫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가장 앞서서 이끌어간다”는 역할로서의 리더가 우리는 필요했다. Chavatar는 비교적 간단한 프로젝트여서 굳이 리더가 필요 없었지만 Blogsy는 달랐다. 규모도 크고 개발기간도 더 길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많은 결정과 시간관리, 리소스 관리가 필요했다. 만약 4명의 사람이 함께 배를 타고 각자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만 열심히 노를 젓는다면 비록 열심히 노를 저었지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도 있고 아니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선원들을 이끌어 배가 목적지로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선장이 필요한 것이었다.
렌스는 이 리더의 자리를 억지로 얻은 것이 아니라 일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다. 나와 션이 Blogsy개발을 하면서 무엇인가 진행된 사항이 있으면 서로 그것을 렌스에게 알리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렌스가 모든 일이 진행되는 상황을 파악하게 되는 그러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약간의 경쟁의식이 션에게 있었다. 그리고 어색함도 있었던 것 같다. 일을 해서 무엇인가 진행을 시켰는데, 그것을 션에게 이야기하자니 자연스럽지 않았고, 션은 렌스에게 자기가 구현한 것들을 이야기했다. 렌스는 참 소위 말하는 리액션이 매우 좋았다. 진행상황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대해 팀원들을 격려해줬고 기쁜 마음을 잘 표현해줬다. 그때까지 내가 진행한 일에 대해서 남에게 설명하고 알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내가 진행한 일에 대해서 알리는 것에 수동적이었지만, 션이 적극적으로 렌스에게 알렸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하게 되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웃지 못할 이야기는 보통 렌스는 나와 션이 개발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사무실 밖에 주로 있다가 가끔씩 사무실에 들어오고, 나와 션은 거의 일과시간 내내 함께 있는데, 바로 옆자리에 있는 션이 그날 진행한 일들을 나는 렌스를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는 날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게 된다. 션은 내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나는 션에게 가끔 무엇을 구현하고 있는지 직접 물어보기도 했다. 션은 그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궁금하다.
렌스가 리더가 된 것은 나와 션이 개발 진행상황을 렌스에게 전달해서 그렇게 된 것도 있지만, 나는 더 근본적으로는 렌스가 리더가 될 자격들을 갖추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리더가 가져야 할 신뢰, 솔직, 정직, 소통, 겸손, 존중, 배려, 체계, 판단능력, 비전 제시 등의 덕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그가 리더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는 렌스가 그 위치를 자기의 주장이나 힘으로 차지한 것이 아니라 동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세워졌다는 것이 참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회의
개발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결정해야 할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기획을 먼저 하고 개발을 시작했지만 기획할 때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을 개발시에 마주하게 되는 경우, 세부적인 UI와 디자인을 결정해야 하는 경우, 그리고 기술적 제약성 문제에 봉착했을 경우 등 결정해야 할 상황이 수시로 발생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모두 모여 회의를 했다.
우리 팀의 회의 시간은 참 치열했다. 평소에 대화할 때는 서로 명랑한 분위기에서 부드럽게 이야기했지만, 회의할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서 가끔은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토의했다. 싸우는 것은 아니었고,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 들을 자유롭게 풀어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다. 한 사람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은 그것에 좋은 점들과 공감하는 점은 그것대로 표현 하고 자기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거나 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 또한 자유롭게 표현했다. 다시 말해 우리 팀은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다른 생각이나 더 나은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자유롭게 표현하는 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회의 분위기가 가능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언어이다.
팀원 4명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사람과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의 차이는 18살이나 됐다. 우리나라 언어로 회의한다면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람끼리 서로 대화하기는 아무래도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회의할 때 항상 영어를 사용했다. 영어를 사용하면 언어 특성상 어떤 사안에 대해 높임을 고려할 필요가 없이 편안하면서도 보다 정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랜스의 사고방식이다.
랜스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충분히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기 생각만이 옳고 최고라는 생각을 하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은 들어볼 필요가 없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보다 둘이 낫고 많은 사람의 생각들 속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회의의 결과로 채택하는 사람이었다. 전에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내 생각이 없이 다른 사람의 생각에 따르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시작 후 얼마 동안은 회의시간에 내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의견을 내면 그 의견 중에 “어떤 것이 더 좋다.” 정도만 표현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아 내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 랜스는 항상 “주성,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봐 줬다. 의견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했지만 그는 회의 때마다 지속적으로 내 의견을 물었다. 이렇게 나에게 지속적으로 질문을 해주니 ‘아이디어도 못 내는 나를 이렇게 존중해 주다니…’라고 고마움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도 지속적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내서 표현하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그때와는 많이 다른 것을 스스로 느낀다.
또 렌스는 프로그램 개발을 직접 하지만 않았을 뿐이지 작은 처리 부분의 개발까지 깊이 관여했었는데, 개발의 특정 부분과 관련해 궁금한 점이 있거나 스스로 생각하기에 논리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을 때 나와 션 그리고 데이브에게 질문했다. 그는 그때마다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너희들이 프로그래머이니까 나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잘 알거라 생각해”라는 말로 시작할 때가 많았다. 예를 들면 “너희들이 프로그래머이니까 나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잘 알거라 생각해.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은 이렇게 처리되거나 저렇게 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렇게 렌스가 질문한 것이 프로그램의 오류를 바로잡거나 질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한마디로 더 좋은 방법이나 해결책이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만약 렌스가 “너희가 더 잘 알거라 생각해”라는 말을 하지 않고 곧바로 문제점을 지적받거나 더 좋은 개선방향을 이야기했을 때, 개발하는 팀원들이 그렇게 했을 때 만큼 쉽고 편안하게 받아 드릴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조금 은 더 방어적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랜스의 존중하는 한마디는 회의를 부드러우면서도 치열하게 해 주는 기름칠과 같았다.
마지막으로는 각 팀원이 사람에 대한 수평적 마인드와 자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수평구조의 회사에서 사원, 대리, 부장, 사장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회의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사장이 어떤 A라는 의견을 제시했는데, 사원이 A보다는 B가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보통은 사장이 제시한 A라는 의견을 두말할 나위 없이 따르는 것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사원이 사장이 제시한 의견을 반박하는 의견을 낸다는 것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한번 한발 더 나아가서 사원이 의견을 낼 수 있다고 가정해 사원의 입장은 정리하고, 이제 사장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사장이 생각하기에 B라는 생각이 실제로 더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사장이 사원의 B의 의견에 공감을 표현하고 지지할 수 있을까? 나는 아마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사원의 의견이 채택되면 자신이 사원보다 못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의 권위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일은 수직적인 조직에서 빈번히 일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팀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다. 내 의견이 채택되던 다른 사람의 의견이 채택되던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좋은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제품에 반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항상 어떤 아이디어를 채택하기 전에 팀원 모두가 충분히 납득해야 했고, 만약 그래도 의견이 나뉘는 경우 다수결로 결정했다. 이러한 자세와 의사 결정 과정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가 채택되더라도 일을 할 때 모두가 그 아이디어에 100% 120% 힘을 쏟는 결과로 이어졌다. 의사결정 과정 중에 내 의견은 무시되고 어느 한 사람이 주장한 것이 결정된다면 아마 그것에 100%의 힘을 쏟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같은 행동이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팀원 4명 모두가 건강한 자아와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비록 자신의 의견보다 다른 사람이 의견이 더 좋다고 하더라도 모두 자존감이 강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가치가 깎이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했을 때, 그 의견을 폄하하거나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선택해서 제품에 반영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팀의 힘의 근원 중 하나가 이런 좋은 회의 분위기라고 생각한다.